역사 덕후 글입니돠

퍼왔지만 잼나는 글. By vito....
출처는 밝힐수 없어연.. 쪽팔리니깐

병;신같지만 멋있는 실록 - 1부 문명을 품은 야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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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여중, 여고생들의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서정적인 프롤로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래서 일전에 올렸던 고려말 막장 상황을 서문으로 대신하고 바로 갑니다.

 

#1. 실전적으로 낵아 甲이거등? 죤만아?


자, 14세기 중반 한반도에는 (잠정적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고려인 주제에? 맞습니다. 그의 권력은 고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세계제국 원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원제국 제2황후의 오라비이자, 태자의 외숙이었습니다. 이변이 없다면 차기 황제의 외가가 될 가문의 수장이기도 했지요. (물론 이변은 생겼습니다. 졸라 못생긴 원조 짱깨 도적놈이 원제국을 탈탈 털고 명나라를 건국 해버렸...) 이 남자의 이름은 아시다시피 기철입니다.

이 당시까지 원은 명백한 고려의 갑이었습니다. 기철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갑의 싸모의 오빠. 고려 국가와 왕실에 대해서 본인 역시 갑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한편, 또 한 사람의 갑이 있습니다. 그는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 해서 즉위한 왕입니다. 그는 고려의 유일한 갑이 되길 원했고, 원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으며, 윗 칸의 모래가 얼마 남지 않은 고려의 모래시계를 뒤집고 싶어했습니다. (불행히도 그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서 모래시계를 박살내고 해시계를 새로 만들어버렸지만) 역시 아시는 바대로 이 사람은 공민왕이라는 시호로 후대에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불편한 관계 속에 <고려사절요>는 하나의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 봄 2월에 원 나라에서 왕에게 공신호를 주어, 친인보의 선력 봉국 창혜 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 하였다. 평장사 기철(奇轍)이 왕에게 시(詩)를 올려 치하하였는데,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공민왕 5년(서기 1356년) 원제국에서 공민왕에게 공신호를 내립니다. 경사스런 자리에 평장사 기철은 왕에게 축하의 시를 올리면서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넘길 정도로 짧고, 간결하고 담담한 기록입니다.

"어익후 축하한다 왕놈아"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랬겠죠. 엄청 건방져 보이네요.

헌데 앞서 밝혔듯이 기철의 입장에서 자신은 공민왕의 갑네 싸모의 오빠입니다. 분명한 갑을 관계에서 자기도 갑네 집안 사람인데 을놈한테 고개를 숙이거나 공손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비슷한 관계로 샘숭그룹 홍여사님의 아우 되시는 가운데신문 홍사장님이 샘숭 계열사나 협력업체 대표한테 굽신굽신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인간사의 만사가 그렇듯 권력 역시도 어디 대단하고 놀라운 초월적인 힘이 아니라 바로 '관계'에서 나옵니다. 서양의 왕권신수설? 조또 애비가 왕이나 자식놈도 왕이지 신수(神授)는 무슨.. 민간인도 탈탈 털어주시는 가카의 권력 또한 사정기관과 언론을 틀어쥔 관계에서 나온거겠지요.

하지만 공민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인 자신이 고려전체의 갑이며, 기철 또한 신하 나부랭이가 틀림없습니다. 졸라 기분 더러웠을 거예요.

사료를 편찬한 김종서 이하 조선의 사대부들이 굳이 저 짧은 기록을 넣은 걸 보면 아마도 이 사건이 공민왕으로 하여금 기씨 일족을 말살하기로 결심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라고 추측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들 사대부 집단은 이런 불손함을 용납하기도 힘들었을겁니다. 잠시 고려사절요 편찬의 책임을 맡은 김종서가 문종에게 지어 바친 고려사절요 권수의 전(箋)을 한번 살펴보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영집현전 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領集賢殿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臣) 김종서(金宗瑞) 등은 삼가 새로 《고려사절요》를 정서해 올립니다. 신 종서 등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올립니다.
(중략)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는 신성(神聖)하신 자질로써 문명(文明)의 교화(敎化)를 밝히시어 신등에게 명하여 요속(遼屬)을 선임(選任)하여 사국(史局)을 열어 편찬하게 하시면서, “전사(全史)를 먼저 편수(編修)하고, 그 다음에 편년(編年)을 편수하라.” 하셨습니다. 신등은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명을 받들어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글을 올리기도 전에 세종대왕께서 문득 승하하시고,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삼가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신들에게 일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일찍이 선왕께 명을 받고는 감히 저희가 거칠고 못난 탓을 하면서 굳이 사피하지 못하여 신미년 가을에야 글을 이루었습니다.
(후략)

"으허헣헣어헝허엏 세종 킹왕짱님께서 저희한테 고려의 사서를 만들라고 하셨는데효. 으헣엏언헝엏허헣 저희가 왕명을 공경하고 막 두려워하면서 열심히 했어효. 근데 막 저희는 못나고 멍청한 새키들이라 생전에 못 올리고 이제서야.. 엉엉 죄송해효 으헣엏엏엉엏"

마치 김뽀글 일가를 대하는 이북 방송 같은 공손함이죠?

당대에 누린 권력의 크기는 기철이 더 클지 몰라도, 역사적 무게감, 존재감은 김종서 쪽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 속에 굵직굵직한 사업들도 수행했고,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역할도 기철에 비해 결코 떨어진다고 할 수 없죠. 실제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가장 먼저 제거한 한 인물이 김종서이기도 했구요.

그런 김종서조차도 왕에게 글을 지어 올릴 때는 저만큼이나 극진하게 굽신거렸습니다. ‘신하 된 자의 예’이니까요.

게다가 신하 臣자는 아동용 한자 교재에 흔히 나오듯이 조복을 입은 남자가 조아리는 모습의 상형자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을 형상화 했으며, 그걸 세로로 세워 놓은거예요. 노예가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상전을 보려면 눈만 힐끗 치켜뜨고 보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신하를 상징하는 글자가 된 겁니다. 또 다른 설은 관리가 백성을 감시하는 눈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는 군요.

어찌됐든 신하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자체가 ‘나는 당신에게 굴종 합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것은 왕조국가에서 임금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나타냅니다.

그놈의 충효에 죽고 사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런 불충한 생키는 뒈져야 마땅함'이라는 판정을 내리며 담담한 기록으로 슬쩍 공민왕의 손을 들어준 듯 합니다.

다시 공민왕에게 돌아가죠.

원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고려왕으로서의 굳건한 지위를 획득하고자 열망했던 젊은 왕은 찝찝함, 분노, 화딱지, 굴욕, 개짜증, 복장터짐, 배알꼴림등등 온갖 종류의 어두운 감정을 넉달 동안 참고 있었습니다. 이런 공민왕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공민왕 5년 5월, 원 황제는 죽은 장인, 그러니까 기씨 형제들의 아버지인 기자오를 이미 영안왕에 봉한 것에 더해 경왕에 책봉해줍니다. 왕은 선뜻 축하의 의미로 대궐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기로 합니다. 을이 갑의 경사를 나서서 축하해준다는데 기철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축하 받지.. 기자오 책봉 축하합니까? 사랑하는 기자오 책봉 축하합니까? 이런거나 한번 해볼까..ㅋㅋㅋ'

뭐 대충 이딴 궁리나 하고 있었겠죠. 반대로 왕은,

'이 시건방진 새키들 다 모아놓고 존나 축하한다 그러면서 존나 싹 다 죽여 버릴거야'

극명한 입장차이를 갖고 있는 양측이 마침내 잔칫날 맞닥뜨리게 됩니다. 친원파 일당을 한큐에 전부 없애 버릴 작정으로 기철 부자와 조카, 그리고 또 다른 권간인 권겸, 노책의 일족까지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기쁨에 가득 찬 기철이 권겸을 대동하고 입궐했고, 왕은 자신의 흑심을 들키지 않기 위해 초반 무진 애를 썼을겁니다. 막 죽이고 싶어 죽겠는데도 말이죠.

그러나 다시 얘기하지만 죽여야 할 상대는 이변이 없다면 차기 원제국 황제의 외숙이 될 인간입니다. 공민왕측은 엄청난 긴장 속에 있었지만 이를 내색할 수도 없었고, 거기에다 죽여야 할 놈들이 얼른 얼른 모이지도 않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더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고려의 갑이 결정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 왕이 곡연(曲宴)을 베푼다는 구실로 재추(宰樞)들을 불러 모두 대궐에 모이게 하고는, 판밀직(判密直) 홍의(洪義)에게 명하여 태사도(太師徒) 기철(奇轍)과 아들 찬성사 유걸(有傑), 조카 소감(少監) 완자불화(完者不花), 태감(太監) 권겸(權謙)과 아들 만호 항(恒), 사인(舍人) 화상(和尙),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 노책(盧)과 아들 행성낭중(行省郎中) 저(渚) 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철(轍), 겸(謙)이 먼저 부름을 받고 왔는데, 밀직(密直) 경천흥(慶千興) 황석기(黃石奇), 판사(判事) 신청(申靑) 등이 몰래 왕에게 아뢰기를, “두 사람은 이미 왔으나 그 나머지 자질(子姪)들과 노책의 부자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만일 일이 누설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빨리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여, 왕이 옳게 여겨 곧 밀직 강중경(姜仲卿), 대호군 목인길(睦仁吉)ㆍ우달적(亏뱃?)ㆍ이몽고대(李蒙古大) 등에게 명하여 장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불의에 기철을 철퇴로 내리치니, 철이 즉시 넘어져 죽었고 권겸은 피하여 달아나는 것을 쫓아가 자문(紫門)에서 죽이니 피가 궁문에 낭자하였다. 철과 겸 두 사람을 죽이자, 기씨ㆍ권씨 휘하의 사람들은 낭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니, 금위(禁衛) 4번(番)의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쏟아져 나와 칼날이 길에 가득하였다. 중경(仲卿) 등은 군사를 이끌고 노책의 집에 몰려가서 그를 잡아 죽였다.

온 집안을 박살 낼 심산으로 일부러 기철, 권겸, 노책 3명의 권간과 그 아들에 조카들까지 죄다 불러 모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철과 권겸만 먼저 도착, 공민왕측은 암살을 언제 시도해야 좋을지 혼란이 생겼죠. 이때, 경천흥, 황석기, 신청 등의 신하가 왕에게 “먼저 온 새퀴부터 빨리 죽이죠. 뽀록나면 졸라 곤란하니까”라고 건의를 했고 그 자리에서 기철부터 때려 죽입니다. 권겸은 도망치다 자문(자하문: 궐의 북쪽 소문)에서 붙잡혀 베여죽었구요.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아들에게 지위가 세습되지 않는 사대부 사회에서는 같은 당의 정승, 판서가 화를 입더라도 학연으로 뭉친 선비 집단의 세력이 유지 되는데 반해, 폐쇄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귀족이나 군벌의 경우 대가리를 제거하면 급속하게 와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강력한 권력 집단을 제거 하려면 정보를 누설시키지 않고 짧은 시간에 일거에 행동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민왕은 기철과 권겸을 제거한 즉시 군사를 풀어 노책까지 살해하고, 3명의 권신 집안을 도륙해 버립니다.

또한 태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나중 일이라지만, 기철의 누이가 황후인 것은 당시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에도 황후의 친정을 아작내는 결정을 과감히 내린 것을 보면 중원의 판세 파악 또한 공민왕 쪽이 우세 했던것 같습니다. 원래 권력에 흥취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세의 현장 말고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무감각해지는 법이니까요. 원나라는 쇠락하는 중이었고, 이 사건으로 고려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한 것은 단 한번 뿐. 그것도 허망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이때 나이 27세, 마침내 고려의 유일한 갑이 되어 권력을 자신의 손에 움켜쥔 젊은 왕은 이제 원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합니다.
공민왕 5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고려군대가 움직일 차례입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아버지도 가문의 명운을 걸고 움직입니다.

P.S
1. 매주 1회 또는 2회 쇟 X리는날 진상하도록 하겠스빈다.

2. 쇟은 가카식 불통 집필을 지향하빈다. 어떠한 택흘이나 반론도 용납하지 않...
농담이고,ㅋ 오류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세효.

3. 이 글은 목적은 딱 두가지, 쉬울 것, 재미질 것. 쇟이 '나능 이만큼 알고 있음 으허허허' 자랑질 하려고 올리는 게 절대 아닙미다. 횽들이 '재미없다 생키야' 하시면
언제든지 때려 칩미다.

4. 최대한 현대인들이 직관적으로 편히 읽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미다. 그리고 현실과 맞는 부분이 있으면 슬쩍 비판을 낑궈 놓도록 하겠습미다.

5. XX이 보고있나? 혛들이 실전적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부끄워 말고 나와라


참고 문헌
<고려사절요> 고전번역원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1권 <개국>
조선국왕이야기 - 임용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조선의 무기와 갑옷 - 민승기
조선의 왕 - 신명호

<논문>
기획2 : 성리학의 수용과 사회변동 고려말 토지겸병과 신진사대부의 동향
이병희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통권 26호

토지와 정치
김영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2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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